축제 : 33일 남음
무왕과 왕비가 미륵산 사자사에 계신 지명법사님을 찾아가던 중 바로 미륵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한다. 이에 왕비는 절을 짓기를 청하자 무왕은 지명법사와 상의하여 인근의 산을 허물어 뜨려 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 한다. 바로 미륵사다. 미륵부처님, 바로 미래의 부처님 3분을 모셨다. 미륵부처는 3번의 설법을 통하여 모든 중생(사람들)을 구제해 주시는 부처님이시다.
무왕은 전쟁에서 지치고 삶의 어려움의 고통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상세계를 현실화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무왕은 다시 한번 백제를 강건하게 하고 자 하였다. 새로운 정신적 토대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이 거대한 국립사찰을 지었다. 그리고 최초의 석탑을 만드셨다.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무왕은 단순히 꿈과 이상만을 이곳에 담아 놓지 않고 미래의 희망도 담아 놓으셨다.
2009년 1월14일 미륵사지석탑 가장 중심부 심주석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비롯한 사리장엄 683점이 세상에 드러났다. 현재의 희망의 빛으로... 가벼운 빗소리에도 미륵산은 연무를 두른다. 부끄러운 새색시인양 눈 오는 날은 그 드넓은 사지가 포근하다. 어머니 품처럼...
지금은 왕궁리5층석탑과 발굴현장이 우리를 제일 먼저 반겨준다. 탑의 유려한 선은 가느다라면서도 끊임없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힘이 느껴진다. 국보289호 왕궁리5층석탑 이 안에 또 다른 국보 123호 금제금강경판과 사리장엄구가 있었다.관세음응험기에 의하면 백제무왕은 익산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정사를 운영하였다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수부명기와를 비롯한 금제품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수부 즉 임금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금제품의 섬세함에 백제인의 금속기술에 익산이 보석의 도시임을 다시금 실감케 한다. 금 결국 왕이 쓴 물건 이었다.
백제의 또 다른 번성에 대한 꿈의 결정체가 바로 이곳 백제왕궁리 유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탑이 말해주듯 무왕의 왕궁은 그 운명을 다하고 다시 사찰로 변모한다. 이곳에서 1.3 km 떨어진 곳에 왕실관련사찰 제석사(지)가 있다. 우리나라의 유일하게 발굴현장을 공개하는 왕궁에 4월의 왕 벚꽃들이 아름답다.
왕궁리 유적지 주변 건물 발굴 조사 과정에서 ‘수부(首部)기와’가 출토됐다. 수부가 나왔다는 것은 왕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왕이 있는 곳에 공급하는 도장 찍은 기와로 알려졌다. 공주 공산성에서도 도장 찍은 기와가 나왔는데 ‘首部’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나온 적은 없다. ‘首部’가 찍힌 기와는 부여와 익산에서만 확인됐다.
이를 비롯하여 유적들이 온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백제 역사 부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서 세계유산에 등재됐다.